필리핀의 세계유산 ‘비간 역사 도시’
루손섬 북서부,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간 역사 도시(Historic City of Vigan)는 필리핀을 대표하는 세계유산 중 하나입니다. 필리핀은 300년 가까이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았으며, 이 도시는 그 시기의 도시 구조와 건축 양식을 오늘날까지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스페인뿐 아니라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영향까지 함께 반영된 독특한 도시 경관은, 식민지배의 흔적과 아시아 무역의 역사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비간 시내를 걷다 보면 정교하게 지어진 가옥과 화려한 수공예품, 라틴풍의 장식들이 거리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아시아에 남아 있는 스페인 통치 시대의 도시들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가장 뛰어난 곳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연중 내내 거리에는 계절별 꽃들이 피어 있어 더욱 아름답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여섯 개의 세계유산 가운데서도 늘 상위에 꼽히는 관광지 비간. 이번 글에서는 그 볼거리와 그 배경을 함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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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간 역사 도시란?
비간은 1574년, 스페인이 루손섬 북부를 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조성한 도시입니다. 그 전에는 ‘일로코스(Ilocos)’라는 이름으로 중국,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던 지역이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는 ‘시우다드 페르난디나(Ciudad Fernandina)’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주택들은 스페인의 건축 기법을 도입하였지만, 자재는 나무 골조와 벽돌을 조합한 필리핀 전통 방식이 사용되었고, 2층에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하는 등, 현지의 기후와 환경에 맞춘 건축적 특징이 돋보입니다.
비슷한 형태의 식민지 시대 거리들은 필리핀 내 다른 도시에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이 태평양전쟁 중 파괴되었고, 이곳 비간의 구시가지만이 기적적으로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명칭: 비간 역사 도시 (Historic City of Vigan)
주소: Vigan, Luzon, Philippines
공식・관련 사이트 URL: https://whc.unesco.org/en/list/502
비간으로 가는 방법
비간으로 가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버스를 타고 풍경을 감상하며 이동하는 방법이 있고, 빠르게 이동하고 싶은 분들에겐 비행기와 버스를 조합한 경로를 추천합니다.
버스는 마닐라의 파사이(Pasay)나 쿠바오(Cubao) 버스터미널에서 직행편이 운행됩니다. 이동 시간은 약 10시간 정도로 다소 길지만, 대형 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예상보다 편안한 편입니다. 단, 실내 온도가 다소 낮게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겉옷을 챙기는 것이 좋습니다.
비행기를 이용할 경우, 마닐라에서 라오아그(Laoag)까지 약 1시간 소요되며, 라오아그 공항에서 시내 터미널까지 이동 후, 다시 비간행 버스를 타고 약 2시간이 더 걸립니다. 전체 여정이 짧아지는 만큼 교통비는 조금 더 들지만, 일정이 촉박한 여행자에게는 효율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비간의 추천 명소 ①: 크리솔로고 거리
비간의 중심 거리인 크리솔로고 거리는, 오늘날 필리핀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스페인 식민지 시기의 거리 구조와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입니다. 돌로 포장된 도로 위를 마차가 지나고, 거리 양옆으로는 카페와 기념품 가게, 레스토랑이 테라스를 내걸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관광객과 상인들로 북적이고, 저녁이 되면 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진 이국적인 분위기로 변모합니다. 조명을 밝힌 처마 밑에서 연주되는 밴드 음악은 마치 한 시대의 풍경을 현재에 불러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거리에는 글로벌 체인점이나 필리핀 대표 패밀리 레스토랑 ‘맥스(Max’s)’ 같은 로컬 브랜드도 함께 있어, 과거와 현재, 식민 영향과 지역 문화가 공존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명칭: 크리솔로고 거리 (Calle Crisologo)
주소: Crisologo, Vigan City, Ilocos Sur
공식・관련 사이트 URL: https://philippinetravel.jp/calle-crisologo/
비간의 추천 명소 ②: 살세도 광장 & 성 바울 대성당
비간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살세도 광장(Plaza Salcedo)은, 그 맞은편에 자리한 성 바울 대성당(St. Paul Metropolitan Cathedral)과 함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 1799년에 건립된 이 대성당은 내부와 외부 모두 흰색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채색된 예수상과 조각들이 정돈된 대칭 속에서 돋보이는 인상을 줍니다.
이곳에서는 일요일마다 미사가 열리는데, 주교가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직접 예배를 이끄는 이색적인 풍경으로 유명합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 일정이 맞는다면 현지 신자들과 함께 예배에 참여해보는 것도 비간 여행의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는 저녁에 약 30분 동안 화려한 분수 쇼가 펼쳐져 지역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비간은 ‘세계유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엄숙하기보다는 활기차고 대중적인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명칭: 성 바울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Metropolitan Cathedral of the Conversion of St. Paul the Apostle)주소: Vigan City, Ilocos Sur, Philippines
비간의 추천 명소 ③: 크리솔로고 박물관
비간 남쪽, 도로변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스페인 식민지 시기 상류층이었던 크리솔로고 가문의 자택을 개조한 공간으로, 세계유산 도시의 문화적 배경을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겉보기엔 소박한 2층 건물이지만, 내부에는 당시 귀족층이 사용하던 식기, 가구, 자동차 등 생활용품이 전시되어 있어 방문객에게 흥미로운 체험을 제공합니다.
이 박물관의 이름이자, 메인 거리 ‘크리솔로고 거리(Calle Crisologo)’의 명칭에도 쓰인 ‘크리솔로고’는 과거 비간의 주지사를 지낸 고(故) 메나 크리솔로고(Mena Crisologo)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도로가에 지어진 이 건물은 그의 생가이자, 유산으로 남은 중요한 장소입니다.
외부에는 별다른 안내판도 없어 눈에 띄지 않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고풍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도 이 지역 상류층의 주거 문화를 상상하게 만드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명칭: 크리솔로고 박물관 (Crisologo Museum)
주소: H9CP+5QJ, A. Reyes St, Vigan City, Ilocos Sur, Philippines
공식・관련 사이트 URL: https://www.vigan.ph/attractions/crisologo-museum.html
◎ 마무리하며
비간은 단지 오래된 거리가 아니라,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시아 교역, 종교 확산, 전쟁, 그리고 민중의 일상 등 다양한 층위의 역사가 공존하는 장소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나 경관의 아름다움 뒤에는, 수백 년에 걸친 힘의 구조와 그로 인한 문화적 변화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보존이 잘 된 유럽풍 도시’로 소비되기보다는, 왜 이 도시가 이렇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는지, 그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닐라에서 가까운 루손섬 북부에 위치한 비간은, 이런 역사적 복합성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여행지입니다.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비간을 직접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